밀덕

팔갑전산 조난사건

gmmk11 2012. 2. 4. 23:05

눈속의 진군 군가를 번역하다보니 일본군 최대의 혹한기 조난사건이 같이 튀어나온다. 영화에서 이노래를 불렀다는데..

그런데 문득 군대서 혹한기 전주에 정신교육 시간에 이 사건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서 주변사람과 말을 맞춰봤다.




역시 배웠다- -; 반도 육군이 정훈교육 자료로 이 사건과 러일전쟁시 사하전역에 대해 혹한기 교재를 만들어서 그걸 나랑 나 또래의 사람들이 본 것이다.
찾아보니 이게 훨씬 더 전에 만들어진듯 본사람이 꽤 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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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건 영화 전체가 아니라 요약본이었는데 영화도 구해다 틀어줬었나보다.




이하는 사건에 대한 위키 번역.

팔갑전산은 일어발음으로 핰코다산이다. 발음편의를 위해 이하 팔갑전산으로 번역한다.

팔갑전 설중행군 조난사건은 1902년 1월에 일본육군 제8사단 보병 5연대가 팔갑전산에서 동계 설중행군 훈련중에 조난당한 사건이다. 훈련참가자 210명 중 199명이 사망한다. 일본의 동계훈련에 있어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설중행군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계획된 것이지만 그 상세는 생존자의 증언이 각각 틀린 점, 또 군부의 압력과 정보조작에 의해 민간인의 군부 비판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실이 은폐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 더욱이 5연대의 설중행군은 제2대대를 중심으로 제5중대장 칸나리 神成 중위의 부대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지만 제1대대와 제3대대에서도 쵸키 長期  오장이 일부 선발했다.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육군이 동계훈련을 긴급과제로 설정했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일본육군은 1894년 청일전쟁의 겨울 한랭지 전투에서 고전했고 더욱 추운 지역에서의 싸움이 될 대 러시아전을 상정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상은 사건발생 2년 후인 1904년 러일전역에서 현실이 되었다.
이 연습의 목적은 대러시아 개전을 상정한 것으로 5연대는 아오모리 해안선 열차가 끊겼을 경우 겨울에 '아오모리-다시로-삼본기-하치노헤'루트로 썰매를 이용한 물자의 수송이 가능한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31연대는 설중행군에 관한 복장 행군방법등의 전반에 이르는 연구의 최종단계로 3년에 걸쳐 실행해온 설중행군의 최종단계였다. 또 5, 31연대는 서로 상세 계획을 몰랐다.



조난 요약

조난당한 부대는 아오모리에 주둔한 보병 5연대 제2대대이다. 부대의 지휘는 중대장 육군보병대위 칸나리 분키치. 단 대대장으로 보병소좌의 야마구치 진이 지휘에 관여했다고 알려져있다. 칸나리 대위는 아키타출신으로 육군교도관을 거쳐 보병이등군조로 임관 순차승진하여 보병대위가 된 인물이다.
칸나리 대위의 명을 받아 위급을 전하는 도중에 가사상태가 된 고토 오장이 1월 27일 수색대에 발견된 것으로부터 조난의 상세가 판명되었다. 결국 5월 28일에 전원 사체가 수용되었지만 부패가 심하여 신분판별이 어려운 이도 있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생존한 것은 11명이다. 이외에도 6명이 더 구조되었지만 치료도중 사망했다. 생존한 장병도 3명을 제외하고 동상에 의한 손발절단, 경미한 쪽은 아킬레스건, 손가락 등을 절단했다. (대부분 사지절단) 또 생존 장병 3명중 가장 건강했던 쿠라이시 대위는 러일전쟁 흑구대회전에서 전사, 남은 2명도 중상을 입었다.

1907년 칸나리 대위의 명을 받은 고토 오장이 조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모기노를 향해 달렸던 공이 인정되어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고토 본인은 쑥쓰러워했다고 한다. 동상 이외에도 현재 아오모리 40호 현도로에 고토오장발견지 팻말이 세워져있다. 동상 근처는 스키 명소로 동상 코스로 유명하다.






1일차 1902년 1월 23일

오전 6시 55분 아오모리 연대주둔지를 출발. 다모기노에서 지역주민이 안내역을 자청하지만 거절하고;; 지도와 나침반 만으로 혹한기의 팔갑전산 답파를 실행하기로 한다. 소설에서는 야마구치 대대장이 거절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견습사관과 하사관이 거절했다고 한다.
초반의 작은고개 小峠 까지는 무리없이 행군했지만 오후부터 큰고개 大峠  부근에서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어 썰매부대의 진행이 늦어지고 길게 휴식을 취한다. 휴대식량류는 전부 얼어버렸고 식사를 하지 못한 병사가 속출했다. 장비 부족과 날씨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우려해 군의관이 주둔지로의 일시귀환을 상신했지만 하사관들의 반대에 의해 행군 속행이 결정되었다.
눈바람을 헤치며 마립장 馬立場  (큰고개에서 팔갑전쪽으로 2km)까지 행군했다. 여기서부터 적설량이 급격히 많아졌고 행군속도가 떨어져서 식량과 연료를 실은 썰매부대가 본대와 2시간 이상 떨어지게 되었다. 칸나리대위는 제2제3소대 88명을 선발해 썰매부대 구원을 보냄과 함께 설영대 15명을 다시로 방면에 척후/선견대로 내보냈다.

저녁 6시, 마립장에서 얼마가지 않아 썰매의 포기를 결정한다. 썰매 짐에 대해서는 각 대원이 분산해서 가지고 가기로 한다. 이 때 취사용 밥솥;;을 멘 병사가 가장 비참했다고 한다. 선견대로 나간 설영대도 진로를 잃고 길을 헤메다가 우연히 본대와 합류했다.

밤 9시가 지나 다시로까지 약 1.5k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일몰에 의해 전혀 안보이게 되어 이 이상의 행군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눈을 파서 노영하기로 한다.


2일차 1/24일

전날 강행군으로 무리해서 추위와 피로를 호소하는 병사가 속출했다. 늦게 도착한 수송대가 오전 1시쯤에 반쯤 익은 쌀을 배급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전 2시쯤 사태를 중하게 본 대대본부는 부대의 귀영을 결정한다.
부대는 마립장을 목표하지만 오전 3시반쯤에 나루사와에서 협곡으로 잘못들어선다. 이때 사토 특무조장이 다시로쪽의 길을 알고있다는 소리를 야마구치소좌가 듣고 독단으로 '그렇다면 안내하라'라고 명하지만, 사토 특무조장은 완전히 길을 잘못들어서 결국 다마고메가와 천 본류까지 나갔다. 그때는 전원 피로가 극에 달해서 대열도 흐트러지고 통제에도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야마구치 소좌는 다마고메가와 천에 도착했을 때 사토특무조장의 진언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지만 방금 온 길은 눈에 의해 완전히 지워져버렸고 부대는 완전히 혼란상태가 되었어 할수 없이 부대는 절벽을 기어올라가게 된다. 여기서 절벽을 오르지 못하고 낙오하는 병사가 나와버린다. 이 행군의 최초 희생자가 되지만 눈폭풍때문에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타마고메가와 천을 벗어날 때 제4소대의 미즈노 중위 (화족)이 졸도후 동사하여 부대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노영지에서 단 수백미터를 전진했을 뿐으로 저녁무렵에는 나루사와 부근에서 푹파인 지형을 발견해서 노영지로 삼았다. 부대는 통제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눈을 파려해도 공구를 가지고 있던 대원이 전원 낙오하여 행방불명이 되어있고 문자 그대로 눈폭풍 노천야영을 하게 되었다. 눈폭풍으로 체감온도가 -50도 가까이 내려갔고 또 전날부터 거의 불면불휴 절식 상태였기 때문에 여기서 많은 장병이 동사했다. 이 장소는 나중에 가장 많은 유해가 발견된 곳이다.

한편 아오모리에서는 귀영예정시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행군대를 맞으러 가기위해 카와와다 소위 이하 40명이 다모기노까지 나갔다. 하지만 24시까지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3일차 1/25일

오전3시쯤 부대는 마립장 방면으로 출발했다. 이 시점에서 사망/행방불명 합쳐서 70명을 넘기고 있다. 그 외의 병사도 대부분 동상에 걸려있었다. 나침반은 얼어붙어서 기능하지 않고 지도를 믿으며 거의 감에 의해 행군하게 되었다.

마립장-나루사와 근처까지 도착한 적도 있지만 바람이 세고 절벽을 만나 진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되돌아간다. 그후 반대방향으로 진행해보지만 전방을 산이 가로막아 길을 잃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대대본부의 장교 칸나리 대위가 협의하여 '여기서 부대를 해산한다. 각자 알아서 아오모리 또는 다시로 방향으로 행군할 것'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것이 소설과 드라마에서 유명한 대사의 소스이다. '하늘은 우릴 버린 것 같다'라는 말을 칸나리 대위가 내뱉었다고 전해진다. 이때문에 이제까지 어떻게든 낙오하지 않고 힘내온 장병들이 이 말에 힘이 빠져 발광하면서 옷을 벗어던지는 자, 이 절벽을 내려가면 아오모리다.!라고 외치면서 강에 뛰어드는 자, 밧줄을 만들어서 절벽을 내려간 후 강을 따라가면 돌아갈 수 있다구!. 외치면서 나무를 향해 가다가 그대로 쓰러지는 자 등 동사자가 속출했다.
단 실질적으로 부대의 통제가 잡히자 않았던 것은 어쨌든 맞지만 이 시기 동행하고 있던 생존자 이토 중위는 '부대가 도중에 해산했다'는 설을 부정했다.

하여튼 이 방황으로  오키츠 대위 이하 약 30명이 동사, 어제 저녁부터 오키츠대위는 동상에 걸려있었고 카루이시 이등병이 간호하고 있었다. 2월 12일 구조대가 발견시에는 카루이시 이등병은 오키츠대위를 끌어안아 감싸듯 쓰러져있었다. (이 이야기는 '조난시말'에 실려있는 '미담집'에도 상관을 감싸며 같이 동사한 것으로 실려있다) 더욱이 하세가와 특무조장을 비롯 나중에 생존자로 발견되는 병사를 포함한 십수명이 행방불명된다. 하세가와 특무조장은 길에서 미끄러져서 헤메게 되고 그를 따르던 수명은 오후2시경 오두막을 발견하여 거기에서 체재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특무조장이 가지고 있던 성냥으로 불을 피워 온기를 되찾았지만 전원 피로가 심해 익 26일 오전 3시경에 화재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불을 껐고 그후는 온기를 취하는 일이 없었다. 본대가 노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야마구치 소좌가 인사불성이 되어있겄고 쿠라이시 대위는 소좌에게 유언을 구했다. 고토 오장에게는 소좌가 이때 죽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오전 7시경 대대본부부속의 쿠라이시 대위는 척후대를 모집하여 비교적 건강한 12명이 두갈래로 나뉘어 마립장 방면으로 척후를 내보냈다. -쿠라이시 대위의 기록에서는 다모기노(마립장)방면과 다시로 방면의 탐색으로 나갔다고 써있다.- 이때부터 부대는 약간이나마 평정을 되찾았지만 그 상황도 길게 지속되진 않았고 오전 10시쯤에는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본 병사가 '구조대가 왔다'고 외치자 다른 병사들도 '정말로 왔다' '엄마!!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쿠라이시 대위는 그 상황이 될 때 마다 카스가 나팔병에게 나팔을 불게 해서 냉정을 되찾게 했다고 한다. 카스가 나팔병은 나팔이 얼어있었기 때문에 입술이 떨어졌고 다음날 동사했다. 다모기노 척후조 타카하시 반에 속한 사사키 일등병이 귀로를 발견했다. 오전 11시 30분 타카하시 척후장이 직접 돌아와서 귀로가 발견되어 다모기노 방면으로 행군중이라고 보고했다. 본대는 돌아온 척후대를 따라 마립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른 한 척후조인 와타나베 척후대의 보고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또 마립장 부근에서 귀로를 발견한 사사키 일등병과 타카하시 오장은 그 후 동사했다. 오후 5시경 쿠라이시 대위가 눈치챘을 때는 오하시 중위 나가이 군의관이 행방불명되어있었다. 나가이 군의와 사쿠라이 간호장 이하 의료반은 병사의 간호에 무리하고 있었지만 그 결과로 본인들도 죽는 결과가 되었다. 이때에는 완전히 부대가 흩어져버렸다.

밤 12시쯤에 쿠라이시대위의 부대는 칸나리 대위의 일행과 합류했다. 이 날은 마립장 북방의 숲에서 노영하기로 했다. 이 날의 노영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동사한 장병의 배낭을 태우는 등 어떻게든 추위를 녹였지만 그래도 많은 수의 병사가 동사했다.
아오모리에서는 날씨가 전날보다 좋아졌기 때문에 오늘이야말로 돌아오겠지 라고 죽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의 일부는 다모기노 마을 남단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밤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22시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둔소에서는 행군대가 삼본기(다시로 동쪽) 방면으로 빠져나간 것은 아닌가 하여 삼본기 경찰에 전보를 넣었지만 확인이 되지 않아 다음날 구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4일차 1/26일
부대는 출발 신호도 없이 날 밝을 무렵에 출발했다. 이 시점에서 생존 장병은 60-70명으로 알려져있다. 부대의 숫자는 1/3이하로 줄어있었다. 전날의 노영으로 야마구치 소좌가 다시 인사불성이 되고 소좌는 병졸에게 업힌 상태로 행군한다. 대열은 흩어질대로 흩어져 선두는 칸나리 대위 쿠라이시대위가 되어있었지만 그 뒤로는 대열도 소속도 계급도 없이 뒤를 따르는 형태가 되어있었다. 칸나리 대위 일행은 전방 고지를 정찰하는 형태로 먼저 앞으로 나가고 쿠라이시대위는 그 후방을 나아갔다.
고토 오장은 눈떴을 대 부근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아오모리로 향하는 도중 칸나리 대위, 스즈키소위와 만난다. 저녁때는 살아남은 부대원을 모아서 2조로 편성하여 행동하기로 한다. 다모기노를 향하는 칸나리 대위 일행과 다마고메쪽으로 행군하는 쿠라이시 대위 일행(야마구치 소좌 포함)으로 나뉜다.





무라카미 일등군의, 미카미 소위, 하사관, 병사 60명의 구원대는 둔소를 출발했다. 큰고개까지 수색활동을 했지만 이 날의 기온은 -14도였고 눈바람도 심해서 안내인(마을사람)의 진언에 의해 수색을 단념하고 다모기노로 돌아갔다.


5일차 1/27
쿠라이시 대위의 그룹은 다마고메가와 천 방면으로 나아가지만 도중에 절벽에 빠져 나가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칸나리 그룹은 길자체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아갔지만 쿠라이시 그룹과는 다르게 심각한 눈폭풍을 만났기 때문에 낙오자가 속출했다. 남은 4인중에서 스즈키소위가 고지를 보러간다고 말하고 출발했지만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3명이 된 후 곧 오이카와 오장이 동사, 칸나리 대위와 고토 오장 두명은 눈 속을 나아가지만 칸나리 대위가 쓰러져버렸다. 칸나리 대위는 고토 오장에게 다모기노에 가서 주민을 고용하여 연대로 연락을 의뢰하라고 명령했다. 고토 오장은 혼자 몽롱한 의식속에서 다모기노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구조대는 탐색활동을 재개했다. 오늘이야말로 어떻게 해서든 행군대와 접촉하려고 안내인을 설득해서 산을 올랐다. 오전 10시쯤 미카미 소대가 오타키다이라 부근에서 눈속에 서있는 고토 오장을 발견했다. 본인은 이때 '거리 방향도 모른채 꿈속을 걷던 중 구조대 때문에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발견당시의 상태를 신문은 ' 직립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고 전한다.'조난시말'에서도 가사상태로 초병처럼 직립해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설중행군대가 조난당한 것이 외부에 알려진다.





오장이 '칸나리 대위'라고 작게 속삭였기 때문에 부근을 수색하여 곧 칸나리 대위를 발견했다. 대위는 전신이 얼어있어서 팔에 정신드는 약을 주사하려했지만 피부까지 얼어있어서 바늘이 부러져버리고 말았다. 그후 입을 열어서 입안에 주사를 찔렀다. 무언가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아나지 않고 그대로 동사했다. 오이카와 오장의 시체도 근처에서 발견했다. 19시 40분 미카미 소위가 연대장 관사로 달려가 오타키다이라에서 고토오장을 발견한 것과 설중행군대가 전멸한 것 같다는 것, 2시간의 수색으로 구조대 60인중 반수가 동상으로 행동불능인 점 등을 알렸다. 아오모리 보병 제5연대장의 츠카와 중좌는 이 보고를 듣고 새파래졌다.


그 후

1월 27일 밤 쿠라이시 그룹에서는 이마이즈미 견습사관이 하사관 1명을 수반하여 주위가 막는데도 불구하고 강에 뛰어들었다. 쿠라이시 대위는 강을 따라 내려갔다고 진술하지만 다른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강에 뛰어든 것이 틀림없고 3월 9일에 하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월 28일 쿠라이시 그룹에선 사토 특무조장이 하사관과 병졸을 이끌고 강에 뛰어들었지만 그대로 동사했다. 이에 대해 쿠라이시 대위는 연대에 연락하려고 간 채 행방불명이라 진술한다. 쿠라이시 외 4명은 절벽에 난 구명에 들어갔다. 야마구치소좌가 있는 강변의 장소화 쿠라이시 대위가 있는 장소에 나뉘에 병사가 있었지만 비교하자면 쿠라이시대위 쪽이 장소가 좋았다. 쿠라이시 대위는 야마구치 소좌에게 여기에 오도록 권했지만 야마구치 소좌는 '나는 여기서 죽겠다'고 거절했다. 그 때 야마구치 소좌에게 물을 주는 역할은 비교적 움직일수 있었던 야마모토 토쿠지로 였다.
1월 29일 구조대가 칸나리 대위의 시체를 수습하고 각 초소도 완성한다. 그때 같은 시기에 설중행군을 하고 있던 31연대가 아오모리에 귀환했다.
1월 30일 강변에서 나카노 중위 외 36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장소는 전에 쿠라이시 대위 그룹이 다마고메가와 천으로 내려갔던 길이다. 이 강변의 이름은賽の河原인데 이는 삼도천의 인간세상쪽 강변을 말한다. 예전에도 여기서 동사자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1월 31일 오전 9시 나루사와 북쪽 오두막에서 미우라 오장과 아베 일등병이 구조되지만 미우라 오장은 결국 3월 중순 사망한다. 아베 일등병은 3일째까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기억이 없고 어느샌가 오두막으로 들어와있었다는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 오두막 주변에서는 16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 때 타무라소좌는 육군성에 생존자 12명이라고 보고하지만 곧 생존2 사망 10으로 정정한다. 훗날 생존장병의 증언으로는 구출 도착이 하루만 빨랐어도 더 많은 장병이 살았을 것이라 증언했다.
역시 오전9시쯤 쿠라이시 대위 그룹이 절벽을 기어올라온다. 15시쯤 250미터정도 나아갔을 때 쿠라이시 대위 이토 중위 이하 4명이 발견되어 생존자는 계 9인이 된다. 하지만 타카하시 오장, 콘노 이등병이 구출 후 사망했다. 이때 구출된 야마구치소좌도 병원에 수송되었지만 2월 2일 사망한다. 야마구치 소좌의 사인은 공식발표로는 심장마비로 되어있다. 하지만 군부 암살설, 자살설도 있다. 최근에는 동상 걸린 손가락으로 총의 조작은 불가능이라는 새로운 연구(사인은 클로로포름)가 있어 검증과 진전이 기대된다.

두번째 노영지에서는 미즈노 중위(화족) 이하 33명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오타키다이라 부근에서 스즈키소위의 시체가 발견된다.
2월 1일에는 강변 賽の河原 을 따라 십수명의 시체가 발견된다.
2월 2일 11시경 지진이 발생하여  하세가와 특무조장의 오두막 근처의 눈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하세가와특무조장, 아베 일등병, 사사키 이등병, 오노데라 이등병 4명의 생존자가 발견된다. 하지만 사사키이등병, 오노데라 이등병은 구출 후 사망했다. 최초 이 오두막에는 8명의 생존자가 있었지만 3명은 부대를 찾아 오두막을 나갔다가 전원 동사, 나가노 군의관은 도움을 구하는 부근의 병졸을 치료하기 위해 오두막을 나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15시경에는 3일째에 대열을 벗어났던 최후의 생존자 무라마츠 오장이 후루야카타 일등병의 시체와 함께 다시로 근처 오두막에서 발견되었다. 무라마츠 오장은 동상으로 사지절단 후 한때 위독했지만 겨우 회복했다. 다시로 주변 오두막에 도착해서 최초의 며칠간은 근처의 온천물을 마시면서 연명했다고 한다.



구조경위

구조활동은 5연대 31연대에 더해 센다이 5포병연대도 출동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최고 1만명이 투입되었다. 그 후 생존자의 수용과 수색방법 확립등은 5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색은 생존자의 증언과 행군계획을 참조하여 행군루트를 추정, 그루트를 중심으로 횡대 30m로 길이 10미터의 대나무봉을 눈속으로 찌르면서 전진,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있으면 바로 파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업은 구축한 초계거점을 중심으로 하루 6시간 정도 진행했다. 1개월이 지나자 수색대원의 발걸음으로 눈이 굳어지거나 기온 변화로 눈이 샤베트처럼 변해서 대나무로는 찌를수 없었기때문에 철봉을 준비했다.
또 수색할동 초기에는 북해도에서 아이누인을 초빙하여 아이누인과 아이누인의 엽견-북해도견과 함께 수색활동을 펼쳐 시체발견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발견된 시체는 너무나 얼어있었기 때문에 잘못다루면 관절이 부서져버리기 일쑤였다. 초계거점에서 의복을 벗겨낸 후 불기운으로 해동하여 새로운 군복을 입힌 후에 관에 넣어 본부로 운반했다. 
익사한 사람은 인양이 곤란하여 그대로 흘러가버린 예가 다수 있다. 이때문에 다마고메가와 천에 울타리를 박아서 흘러가지 못하게 하고 여기에 걸린 시체를 수습했다. 하지만 바다에서 발견된 시체도 있다고 한다.
최종 수습은 5월 28일이었다.


사고원인

기상조건
미증유의 한파가 일본열도를 덮쳤을 때 설중행군을 감행했다. 아오모리는 평년보다 8-10도 정도 더 낮았다. 관측병이었던 간호병이 기록을 남기지 않고 사망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산중기온이 -20도 이하였다고 추측한다.

부실한 장비
행군시 장졸의 장비는 특무조장 이상이 모직 외투, 모직 군모, 플란넬(면+양모) 동복, 장갑1족, 장화형 군화, 장화형 설상화, 하사관 이하가 모직 외투 2벌 껴입기, 펠트 보통군모, 보통군복, 장갑1족, 단화형 군화로 동계등산 장비로는 치졸한 수준이다. 쿠라이시 대위가 고무신발을 가지고 있던 것이 결과적으로 동상을 막았다고 하지만 이건 정월에 동경에 갔을때 우연히 선물로 사온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고무신발은 패션상품에 지나지 않았고 쿠라이시대위가 행군에서 고무신발을 신은 것은 우연이었다.

지휘계통 혼란
설중행군대의 총지휘자는 행군대장 칸나리 대위였지만 여기에 야먀구치소좌와 약간명의 대위가 행군참군으로 동행하는 형태가 되었다. 책임자는 칸나리 대위였지만 곧 야마구치 소좌가 지휘를 잡고 동행해있던 대위들이 동격의 지휘관으로 참견했다. 야마구치 소좌가 지휘를 했다는 증언도 있다

극단적 정보부족
칸나리 대위가 설중행군대의 지휘관이 된 것은 행군실시 3주전이었다. 그 전까지의 담당자는 부인출산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갔다. 이때문에 칸나리 대위는 아무 예비지식 없이 준비작업에 들어가지만 준비작업이란게 작은고개까지의 소대편성 소풍정도였다. 이 준비행군자체가 맑은 날씨에서 진행된 점도 있어서 동계등반과 강설시 행동의 위험을 산출하는데 실패했다. 또 칸나리 대위는 장교가 된 후 설중행군을 한 경험이 없었다.

인식부족
설중행군 참가자의 대부분은 이와테, 미야기의 농가출신자였다. 아무리 한랭지의 출신자라해도 혹한기의 팔갑전산의 방한지식이 없었던 점, 예비행군이 맑은 날씨에 이루어진 점 등 설중행군을 트래킹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세가와특무조장은 '다시로까지는 겨우 5리 거리이고 거기에 온천도 있어서 소지품으로 수건 한장 챙겼다'고 증언했다. 하세가와는 소총 방한피를 발에 말아 동상을 예방했다. 조난시말에서는 일반적인 등산이라 생각하여 가죽제 군화에서 지카타비(닌자신발;;)로 갈아신고 참가한 병사도 있다고 한다.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아무도 예비양말, 군화를 챙기지 않아서 젖으면 갈아신을수도 없고 동상에 걸리고 체온과 체력을 빼앗겨 동사해갔다고 한다. 오하라 오장도 '그때 만약 나에게 예비의 장갑, 양말 한족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발과 손을 자르지 않아도 되었고 반수이상의 병사가 살아남았겠지'라고 진술하였다. 또 행군전날 대대장 및 군의관 명령으로 방한도구 점검, 동상 방지, 동계 식사에 대해서 각소대장에게 상세한 주의사항이 전달되었다고 되어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주의사항이 병졸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들은 병졸도 별로 준비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병사 중 생존자는 전원 산간지방 출신으로 평소에 동계 사냥에 종사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동계 산간에서의 행동에 어느정도 숙련되어있었고 '발에 붉은고추를 비벼 온도를 높인다' '발에 기름종이를 말아 수분의 침입을 막는다' '속옷과 군복 사이에 신문지를 넣어 체온을 유지한다' ' 식품을 기름종이에 싸서 배낭이 아닌 품속에 넣어 동결을 막는다' 등 독자의 방한대책을 실시했다. 장교의 생존율이 병사보다 높은 것도 방한기능이 높은 장비가 원인으로 지목된다.


전원생환 31연대
31연대 루트로 입산한 31연대 38명도 엄청난 눈폭풍에 휘말렸지만 거의 전 경로에 안내인을 세운 덕분에 훌륭하게 답파에 성공, 무사히 전원 생환했다. 공식적으로 5연대의 조난을 안 것은 다모기노에 도착한 이후로 (도중에 동사자와 버려진 총을 봤다는 증언기록이 있지만 군의 함구령에 의해 묻혔다) 악천후속에 민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떠나는 등 답파하는 시간을 줄이기위해 강행군을 했다. 31연대가 무사귀환한 이유는 아래의 이유를 꼽는다.
1. 날씨가 불량해지는 것을 보자마자 깊이 4미터에 이르는 구멍을 파서 비박을 하였고 도중에 잠들어버리는 대원이 있으면 모두가 밟아서 깨우는 등 동계 산행의 무서움을 숙지하고 있었다.
2. 연대를 이끌던 지휘관 토쿠시마 대위가 한랭지에 대한 여러 연구를 고안했고 철저한 성격이었다. 대원의 짐을 최소한으로 하고 식량의 보급과 숙박을 전부 민간에 맡기는 점 등.
3. 연대가 비교적 소수로 최후까지 통솔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4. 연대에 한랭지 출신자가 많았던 점
5. 후쿠시마 대위가 과거 2년간 이와키산 설중행군을 실시하였고 노영을 포함하여 경험이 풍부했다.

1월 29일에 31연대는 아오모리에 도착하여 주민의 환영을 받고 공식적으로는 이 날 5연대의 조난을 아는 것으로 했다.

주황색이 31연대, 아오모리에서 시계 반대방향 돌았다.
파란색 5연대는 아오모리에서 우측 4시방향으로 주욱 직진하여 태평양연안까지 갈 생각이었다. 물론 몇km 가지도 못하고 조난;; 한 4km쯤 갔다.




 그외 에피소드
이 사건에서는 설중행군한 병사뿐만 아니라 31연대와 함께 다시로에 길안내로 나선 안내인도 후유증이 남는 동상에 걸리는 등 피해를 당했다. 나라에서 보상이 있었던 병사와 달리 안내역의 마을사람들에게는 귀가시 필요한 기차요금만 지급되었고 그 후의 비참함은 병사보다 더 했다. 영화에서는 안내인에게 경례를 하는등 어느정도 경의를 표했지만 영화니까 그런거다.
또 훗날 발표된 당시의 안내인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다시로로 향했던 행군에서 되돌아갈 것을 진언한 안내인을 혼내서 무리하게 안내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시로 주변의 척후까지 명했다. 온천을 찾아오라는 명목이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도중에 발견한 오두막에서 휴식하였지만 전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교대하며 들어가서 휴식했다. 더욱이 토쿠시마는 팔갑전산 최난코스를 통과한 후 작은고개 부근에서 피로가 극에 달한 안내인들을 버려두고 부대만 다모기노에 들어갔다. 이들 안내인은 전부 중증의 동상을 입어 그 중 한사람은 입원하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폐인처럼 살다가 16년후에 사망했다. 또 한사람은 동상으로 뺨에 구멍이 나서 물을 먹는 것조차 힘들어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쇼와 5년에 처음 밝혀져서 마을에서는 7용사로써 그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사건의 생환자 중 가장 오래 산 오하라 오장은 양 발과 손가락을 절단했지만 91세까지 살았고 1970년 사거했다.
사건은 1971년 소설화 1977년 영화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1932년 1월 제2차 설중행군을 감행, 참가자 전원 무사히 팔갑전산 답파에 성공했다.
1972년 1월 아오모리 제5 보통과연대가 근대장비를 이용하여 팔갑전산 설중행군에 성공했다.
1997년 7월 레인저 양성훈련중이었던 아오모리 제5보통과연대 훈련생 15인 교관 8인이 팔갑전 온천 근처 다시로 목장 입구의 움푹 들어간 지형에서 가스중독으로 쓰러져 3인이 사망했다.
팔갑전산 조난사건을 들은 노르웨이 국왕 호콘7세가 1909년 위로선물로써 메이지천황 앞으로 스키2대를 보냈다.




  시체 회수 지점을 표시한 지도이다. 타원형으로 4km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있었다니 눈의 무서움을 잘 알 수 있다. 두번째 확대사진의 사람 많이 죽은 곳이 2차숙영지 바로 위의 한자가 나루사와, 그 옆 등고선 가파른 봉우리가 마립장이다. 
다마고메가와 주변으로도 등고선이 가파른데 강 주변 절벽이 저걸 말하는 듯하다. 감입곡류하천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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