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

러일전쟁 료양회전

gmmk11 2012. 9. 23. 21:15

군가 타치바나 중좌를 번역하려니.. 료양회전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한데


국내에 주욱 풀어쓴 글이 없군- -;


나라도 비록 일본위키지만 몇줄 옮겨본다.




*요양이 맞지만 자꾸 요양이 생각나 북괴스럽지만 이하 료양으로 통일*


료양은 중국동북부 요녕성의 도시로 당시 인구 6만의 하얼빈에 이어 남만주의 전략거점. 지리적으론느 평야로 여순에서 하얼빈에 이르는 동청철도가 달리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일본의 참모본부에서 카와카미 소로쿠, 고다마 겐타로가 대러시아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은 러시아군이 시베리아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수송하기 이전에 적극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고, 러시아의 주전력이 집중되기 전에 단기결전으로 남만주를 확보하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만주로 향하는 주전력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우수리 전력에 의한 분진합격을 구상하고 료양은 봉천, 해성, 철령과 함께 진격목표의 하나였다.



봉천







해성





철령




러시아측에서도 개전 전부터 기본전략이 본국으로부터 병력을 수송하여 료양부근을 제1선으로 병력을 집중하고, 하얼빈을 퇴로로 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며 공세를 펴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개전직전에는 육군대신 알렉세이 크로파트킨이 만주군총사령관으로 부임한다.


1904년 2월 9일 러일전쟁이 시작하고 일본측은 제12사단을 인천에 상륙 - 조선에의 위압상륙, 여순항을 봉쇄하여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면서 요동반도 직접 상륙을 가능케 했다. 제3군(노기 마레스케)이 여순공략을 담당하고 기본전략대로 분할 진격을 실시하여 제1군(쿠로키 타메모토)이 한반도의 대동강에 상륙하여 5월 1일에 압록강 회전을 치룬 후에 북상, 제2군(오쿠 야스카타)이 5월 5일 요동반도의  염대오 지역에 상륙하여 여순요새 고립화를 노린 남산공략을 행한 후에 대련을 점령, 5월 30일부터 동청철도를 따라 북진하여 득리사, 대석교에서 러시아군과 전투하며 북진한다. 제4군(독립 제 10사단으로 불렸으나 후에 제5사단을 더해 군으로 편성 노즈 미치즈라 대장이 지휘함)은 중간지점의 대호산에 상륙하여 료양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 탁목성을 공략하여 료양을 포위했다.


한자지만 보는데 문제업ㅇ음.. 남쪽이 일본군


일본측의 제해권 확보로 러시아측은 기본전략을 변경하여 크로파트킨은 병력을 직접 료양에 집결시켜서 일본군 제1군이 접근하는 국경지대의 압록강에도 군을 전개한다. 그 외에도 여순구출의 부대를 편성하여 병력을 내지만 현장지휘관의 전의가 낮았기 때문에 일본군 제2군의 병력을 과대평가하여 료양으로 후퇴해버린다.







일본군은 8월에 료양 집결을 거의 완료하고 동쪽으로부터 제 1, 4, 2군을 전개, 제1군이 태자강을 도하하여 동쪽으로 우회하고 러시아군을 측면에서 두들기는 작전을 계획했다. 8월 3일에 아키야마 요시후루 소장이 이끄는 기병제1여단(둔소 : 나라시노)는 적진 정찰을 하도록 명받고 료양회전 전까지 정찰임무에 임했다. 이기병1여단은 기병 이외에 보병 제 38연대( 둔소 : 후시미), 야포병 제 14연대, 기병포 중대, 공병 제4대대 3중대의 복합형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고 아키야마지대로 불린다.



출처 : http://www.sakanouenokumo.com/ryouyou.htm

(이 뒤로의 사진은 사이트에 가서 훑어볼 것. 설명을 잘 해놨다.)


8월 26일 제1군은 홍사령으로 진격하고 동일 오후에는 궁장령에서 제2사단이 백병야습을 감행하여 러시아군을 쫒아내고 러군의 제1선진지를 물린다. 

제2군도 8월 25일에 진격하여 러이사군을 후퇴시킨다. 28일에는 만주군총사령부가 제2군에게 높이 209m의 감제고지인 수산보 진지 공략을 명하고 30일에는 진지에의 공격을 개시하지만 전황이 말린다. 








30일 심야에는 제1군이 연도만에서 태자강을 도하하여 료양을 우회하여 러시아군 제2진지를 공격한다. 러시아측은 제1군의 측면공격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정찰의 불비로 안히여 일본군의 행동을 포착하지 못하고 각 사단으로부터의 증원부대를 급조편성하여 응전했다. 제1군은  만두산을 확보하였고, 제2군은 러시아군의 병력차출 영향이 있어 9월 1일 수산보를 점령한다.







9월 4일 크로파트킨은 퇴로의 차단을 우려하여 전군에게 봉천퇴각을 지시한다. 일본측은 병력소모와 누적된 전투피로도 있어 추격은 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하얼빈 공략이 불가하게 되어 기본전략을 할 수 없이 변경하였다. 료양회전은 일본군의 로양입성으로 끝났으나 크로파트킨은 전략적 후퇴라 주장하여 양군이 동시에 승리를 선언한다. 사상자는 일본측이 2만3500명, 러시아군이 2만여명으로 양군 합쳐 4만명이상이다.


일본군에서는 8월 31일에 료양회전의 수산보 쟁탈에서 타치바나 슈타 소좌가 전사하여 해군의 여순항 폐색작전에서 전사한 히로세 타케오 소좌와 함께 군신이 되었다.




이제 타치바나 중좌의 자세한 전사경위와 노래를 번역한다.

http://gmmk11.tistory.com/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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