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

이지치 코스케

gmmk11 2012. 1. 1. 13:09



여순포위전에서 3군 사령부 무능;;의 대표주자 노기와 이지치참모장의 위키에 좀 다른 해석이 있어 번역한다.


 


 
사츠마출신, 사관생도 시절 서남전쟁에 참가하고 포병소위로 임관.
4년동안 프랑스유학, 그 후 독일유학, 대몰트케류의 전략전술을 노기와 함께 수강한다. 
청일전쟁 때는 제2군참모부장, 대본영참모, 참모본부1부장, 영국주재무관
1900 육군소장, 야전포병감
1904  경성공사관 무관, 제3군참모장, 여순함락 후 여순요새사령관, 동경만 요새사령관
1906 동기중 수석으로 육군중장
1911년 병으로 휴직, 예비역편입

1904년 1월 야전포병감이었던 이지치는 갑자기 한국공사관 무관이 된다. 러일전쟁에 대비해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참모본부는 관련인물을 한국에 파견해서 정보임무와 특별임무에 종사하게 했는데 그 일환이었다. 개전초반, 대륙진출을 편하게 하기위해 한국임시파견대 (오오고시여단)의 숙영 준비등이 행해졌다. 또 임시파견대 도착 전날 만찬회를 열어 기만공작을 실시해 인천앞바다 해전 뒤의 병력상륙을 무사히 성공시켰다. 개전후에 생긴 노국공사 및 공사관호위부대의 처리에도 이지치의 활동이 컸다. 
이지치는 프랑스어가 능숙했고 서양의 풍속관습에 정통해있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또 당시 한일 양국간의 큰 문제였던 한일의정서체결문제에도 관여하여 2월경에 한국내의 반일파를 배제하는데 성공한다. 이지치의 공사관무관으로서의 임기는 2개월이었고 3월에 본국 귀국, 다시 야전포병감이 된다.
그 후 여순요새공격을 위해 편성된 제 3군의 참모장에 취임, 취임 이유는 포병과출신이기 때문에 요새공략에 적임이고 영독불의 유학경험에서 최신 군사지식에 밝은 점등이 꼽힌다. 청일전쟁에서 제2군 참모부관으로 여순공방에 참가한 경험도 고려되었다 한다.
제 3군은 대련에서 요동반도를 서진해가는 과정에서 러시아군의 방어진지 공략을 몇번이나 경험하고 러시아군의 방어가 견고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지치는 신중한 태로를 보이게 되었다. 이 태도는 비관/소극적이라고 받아들여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예하부대의 지휘관이었단 11사단 제22보병여단장 카미오카 소장은 '늙고 변덕스런 老朽変幻 인물을 참모장에 두면 결코 군대의 경사가 있을 수 없다.'고 일본의 나가오카참모차장에게 보냈다.
제3군은 7월 30일에 러시아군은 요새 내로 몰아넣고 포위를 완성시켰다. 포위가 완성될 즈음에 이구치 만주군총사령부참모가 제3군에 방문한다. 총사령부는 이미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고 이구치는 병으로 대본영에 남아있다가 총사령부에 합류하는 도중에 잠깐 들른 것. 대본영은 제3군을 조기에 북방전선에 참가시키고 싶어했고 또 여순요새 공략을 낙관하고 있었다. 이구치는 대본영의 의향은 '여순요새 공략 기간을 단축할 것'이라고 3군사령부에 전하지만 요동반도 각지에서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어를 실감하고 신중한 태도가 된 이지치는 '급진돌격한번에 요새를 떨구려는 것은 실패를 피할 수 없다'고 완고히 거부했다. 때문에 두사람의 사이가 험악해져서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포위 후 군사령부는 류수방 柳樹房 이란 장소에 설치된다. 여기도 가끔씩 적탄이 떨어지는 곳이었지만 제1회총공격 때는 전투사령소가 격전지였던 동계관산 북쪽보루에서 3km 떨어진 곳까지 전진해 설치되었다. 총공격의 공격방법은 '강습'이 선택되었다. 당시 '폰 자벨의 강습전법'이란 것이 군사학계에 유행한 것이 영향을 줬다고 보인다. 여순요새는 각 보루를 콘크리트 (당시는 불어로 '베톤'이라 불렸다)로 굳히고 보루 사이에는 참호를 파서 철조망을 깔았고 이것으 3중으로 설치한 근대요새로 기관총, 대포, 지뢰로 보호되어 있다. 1차 총공격은 대손해를 입고 동/서 반룡산 보루의 확보에 그쳐 실패로 끝났다.
총공격 실패 후 대본영 나가오카로부터 '공성포 28cm 유탄포 4문을 보낸다'라는 전보가 3군에 전해졌다. 이지치는 답변으로 '도착까지 총공격을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보내달라'고 답변했다. *언덕구름과 틀린 부분.
총공격 중지 후 류수방에서 이후의 공격방법이 논의 되었는데 군사령부측은 강습을 취소하고 정공법으로 바꾸는 제안이 나왔지만 각 사단 대표들은 지속 강습을 주장했다. 토론 진행자였던 이지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노기의 판단으로 정공법이 채택되었다.*강습은 보병돌격, 정공법은 준비 포격 후 차근차근 진격.
포위전 도중 공략이 늦는 다는 이유로 만주군총사령부와 대본영이 제3군사령부의 인적쇄신안을 꺼내든 적이 있지만 메이지천황과 오야마 이와오의 반대로 기각되었다. 공략 후 이지치는 여순요새사령관에 임명되어 참모장 직에서 떠났다. 전쟁종결 후 개선행사에서는 제3군사령부에 동석했다.


평가
긍정/부정론이 존재한다.
부정론의 대표주자는 시바료타로인데 그의 소설 언덕위의 구름에서의 이지치는 작전지휘능력이 결여된 무능자로 평가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지치의 평가이다. 여순공격에서 융통이없는 경직된 작전지휘를 행해 손해를 확대한 점이 비판받고 있고 이것이 이지치 개인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이런 인재를 참모장으로 앉힌 것은 번벌 코드인사의 병폐라고 확대비판하고 있다. 또 전후에 러일전쟁의 공훈으로 남작이 된 것도 총화적인사 総花的人事 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장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중장으로 퇴역한 점도 당시에도 이지치의 평가는 별것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정적 평가에 대해 부당하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1. 러일전쟁 발발 당시 이지치의 평가를 객관적으로 보면 몇번의 해외유학을 경험한 인재이고 또 전문이 포병, 청일전쟁시의 여순공략전에서 현지를 직접 경험했고 유럽유학 시 노기를 보좌한 경험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지치가 제3군 참모장에 임명된 것은 이상한 점이 없다.
2. 여순공략시의 작전 지휘 능력의 평가에 대해서는 원래의 명령이 '여순을 빨리 공략할 것' 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동북정면을 주 공격목포료 한방에 요새의 명줄을 작전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러시아군이 요새의 방어의지를 포기한 사건은 203고지 공략이 아니라 그 1개월 후의 요새 동북정면 주요거점의 함락에 의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여순요새에서 가장 견고한 동북정면의 공격에 집착한 작전입안은 타겟을 정확히 맞춘 것이었다.
3. 제1차 총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후 바로 강습법을 버리고 정공법으로 작전을 바꾼 것은 당시 군대의 군제와 편성을 생각해보면 유연한 대응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몇년 후에 벌어진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서부전선에서 하루에 몇만명의 장병이 희생되는 전투가 몇일에 걸쳐 일어나도 각국 사령부는 작전을 계속하여 대량출혈을 부르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여순공략후의 흑구대회전에서 전선정찰중이던 아키야마 지대의 경고를 무시한 만주군사령부는 러시아군의 공세가 시작되어도 믿지 못하고 기존작전을 고수하다가 큰 피해를 봤다. 당시의 군은 한번 결정한 작전과 판단을 쉽게 바꾸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것을 해낸 제3군은 완고하기는 커녕 유연한 사고를 하고있었다. 
4. 대장에 승진하지 못하고 퇴역한 것을 두고 그의 평가를 의문시하는 지적이 있지만 그는 동기중에 톱으로 중장이 되었고 질병으로 예비역이 된 시점에서 동기중 대장이 된 사람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의미한 지적이다.
5. 당시 제6여단장으로 용전하고 후에 3군참모장이 된 이치노헤 一戸兵衛 소장은 전후의 회고에서 '여순전 당시엔 군사령부의 작전을 의문시했으나 막상 참모장이 되니 당시의 작전일지를 다시 읽어보고 그때의 작전지도는 타당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지치의 평가가 나빠진 것은 이하의 유인이라 생각된다.
1. 노기의 군신,성웅화가 진행되면서 노기로의 비판을 참모장이 뒤집어썼다.
2. 여순공략 실패의 원인은 탄약의 부족이 컸는데 총사령부와 대본영에게 보급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 육군 내부의 이지치에 대한 평가를 떨어트렸을 가능성이 있다. 대정,소화시기의 일본육군은 러일전쟁의 경험과 1차대전의 관찰로부터 일본의 빈약한 국력과 공업력을 가지고는 근대전의 막대한 소모에 도저히 견딜수 없다고 판단하고 정신력을 기반으로 하는 백병전력, 지휘관의 의지력, 통솔의 묘 등 무형전력에 큰 기대를 걸게 된다. 이러한 사상으로 러일전쟁을 생각할 때 탄약의 부족을 가지고 총사령부를 비난한 이지치의 평가가 악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3. 그의 성정이 강직했던 점. '늙은 변덕쟁이' '제3군의 이공 伊公 ' 등 동시대의 인물이 남긴 평가에서도 좋은 소리는 찾을 수가 없다. *이공 伊公 이 누군지 모르겠군.;
4. 무엇보다 종래의 연구가 1차사료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적이 별로 없었다. 최근  長南政義 의연구에 의해 일기등의 일차사료를 기반으로 청일전쟁의 참모활동과 한국공사관 무관 시절의 이지치의 활동을 평가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長南政義 는 이지치의 모장으로써의 측면을 고찰하여 종래와는 전혀 다른 이지치상을 묘사했고 청일전쟁과 무관시절의 이지치의 활동은 남작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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