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때 한참 잘 써먹고 5년뒤 한국에도 면면히 이어지는
육탄x용사 시리즈의 원조이다.
이하 위키 발췌역
http://ja.wikipedia.org/wiki/%E7%88%86%E5%BC%BE%E4%B8%89%E5%8B%87%E5%A3%AB
폭탄 3용사는 육군 독립공병대대 (둔소 : 후쿠오카 쿠루미)의 에시타 타케지, 키타가와 스스무, 사쿠에 이노스케 세명으로 모두 일등병이다.
제 1차 상해사변 중인 1932년 2월 22일 채정개가 이끄는 19로군이 상해 교외의 묘행진에 구축한 진지의 철조망을 돌파하기 위해
점화한 폭탄통Bangalore torpedo의 3인운반 대형버전...을 가지고 적진에 강행돌격하여 폭사하였다.
3명은 전사 후 각각 2계급 특진하여 육군오장이 된다. 사건 직후 2월 24일에는 도쿄 아사히 신문에 '[제국만세]라고 외치며 본인은 산산조각'
25일에는 서부 마이니치 신문에 '충렬! 그야말로 분골쇄신' 등등 미담으로 널리 보도되었고 장렬무비의 용사로서 떠받들어졌다. 군국주의 열기도 높아져 영화와 노래로도 만들어져서
육군 사상처음 조의금이 모였다.
하지만 3명의 죽음 기술적 실수라는 설도 있는데...
'도화선을 짧게 절단하고, 미리 점화하여 돌입하려했으나, 선두에 서있던 키타가와 스스무가 총에 맞으면서 세명이 함께 넘어져서 시간을 지체하였고
다시 돌아오려했으나 그대로 돌격하라고 명령받아서 그대로 돌입,
목적지점 닿았는지 안닿았는지 애매한 위치에서 폭탄이 폭발한 사고,라고 보고 있다.
동시에 공격에 참가한 다른 조(총원 35인)과 같은 적진지의 다른 방향을 담당하였던 공병부대도 같은 공격을 행하여 전사자를 냈다.
고블린 사퍼가 3명인게 혹시 ㅋ
러일전쟁때도 미담으로 적진에 돌진하다 사망한 육군 타치바나중좌와 해군 히로세 중좌가 있지만
타치바나 중좌는 공격지시를 내리고 앞장서다 죽은거고
히로세 중좌도 배를 좌초시키고 버리고 오는 작전중에 유탄에 사망한 것이었다.
그외 수많은 희생은 지휘관이 새로운 전장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무수히 죽어나간걸로 1차대전 유럽정도의 희생에서 멈추고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몸던져 죽으라는 지시는 이것이 기록상 처음으로
일본이 맛이 가기 시작하는 첫단계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시간나면 폭탄 3용사 군가를 번역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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