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

남호, 북호 작전

gmmk11 2011. 11. 9. 21:23

南北호작전이라 불리는 일본의 동남아 물자 특.공.수송 작전이다.


위키를 살짝 번역해본다.


남호작전


태평양전쟁중 일본은 석유,철광석,고무,쌀등의 자원을 남지나해를 경우해서 본토로 해상운송시키고 있었다. 특히 싱가폴과 일본을 연결하는 석유수송로가 중시되어 '히선단'이라 불리는 호송선단이 운항되었다. 연합군은 이 시레인을 잠수함으로 공격하는 통상파괴를 실시하여 1944년 후반에는 필리핀에 상륙, 필리핀을 거점으로 하는 항공기로 남지나해상을 차단했다.

*히선단:필리핀-휘리핀의 히 또는 히노마루의 히를 땄다는 설이있다. 일본의 남방발 일본착 선단을 말한다. 일본행이 짝쑤 남방행이 홀수로 이름붙여졌다. 히02선단은 싱가폴에서 일본행이 된다.

1945년 1월 12일에는 수송선 10척을 연습순양함 카토리를 기함으로 하는 제 101전대 6척이 호위하는 히86선단이 미해군38기동부대에 포착되어 호위함 3척을 남기고 전멸, 동시기에 남하중이던 히87선단(수송선 10척, 호위함 11척)도 긴급대피한 홍콩 항 내부에서 공습을 받아 수송선 6척을 잃었다. 두 선단 다 당시 일본으로선 큰 규모이고 강력한 호송선단이었지만 공습앞에 무력했다.

1945년 1월 일본은 석유같은 최중요자원수송을 목적으로 한정해서 남방항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특공정신'에 의한 '돌파수송'을 실행하기로 한다. 1월 20일 대본영 육군부와 해군부사이에 '연료등의 중요물자긴급환송작전실시에 관한 육해군중앙협정'이 체결되어 해군의 담당부분에 관련해서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지휘하에 '남호작전'이 결정되었다. 
1월의 미해군 기동부대 습격에 의한 피해로 유조선이 부족했기 때문에 손상된 수송선의 수리를 서둘러 마친 후 남호작전에 투입되었다. 히86선단의  전훈을 반성하여 종래의 대선단주의를 버리고 공습에 의한 피해를 줄이리기 위해 수송선을 수척으로 쪼갠 수규모 선단이 원칙으로 정해져 가능한 한 호위함을 붙였다.(선단을 쪼갤경우 앞부터 ABC를 붙인다.) 예를 들면 히88A선단은 유조선 '세리아마루'1척과 호위 구축함,해방함,구잠정의 8척으로 구성되었다. 수송선 자체에도 대공기총과 폭뢰를 설치했다.

3월까지 11차에 걸쳐 유조선 30척이 파견되었지만 대부분 중간에 격침당했다. 와중에 17000kl의 항공가솔린 수송을 몇번이나 성공시킨 '세리아마루' 같은 예도 있고 3월 27일에 토쿠야마항에 입항한 쿅토마루까지 6척이 임무를 달성했다. 한편 1월 20일-3월16일까지 항행한 중요자원선단은 15선단, 수송선은 45척, 호위함정은 50척이 되지만 그중 수송선 20척과 호위함 4척을 잃었다.
3월 16일 오키나와에 연합군 상륙을 앞에두고 더이상 성공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남호작전 종료명령이 나갔다. 남방에 남아있던 가동선박을 긁어모아 히88J선단 수송선7척, 호위함 9척이 최후의 항해로 3월 19일에 싱가폴을 떠났지만 도중에 분리한 사이공행 선박 3척을 제외한 수송선전멸, 호위함 3척 침몰이라는 전과로 끝났다. 이를 끝으로 일본의 남방자원항로는 폐쇄되었다.



 전후에도 활동한 1만톤 유조선 세리아마루





북호작전


1945년 2월 10일부터 20일에 걸쳐 실행된 일본군의 철수, 및 수송작전이다. 일본해군 역사에서 사실상 최후의 성공을 거둔 작전
작전 실행 2주전, 남지나해에서 동일 항로를 취했던 히86선단이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부대전멸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귀한했기에 키스가철수와 함께 '기적의 작전'이라 평한다.

남지나해에서 연합군의 통상파괴작전이 본격화되고 일본의 군수 민수 수송선의 피해가 격증, 또 남방파견군이 본토와 단절되어 유병화되어있었다. 이로 인해 이들 고속,중무장의 전투함정을 이용한 자원수송을 결정했다. 다만 전투함정이라 할지라도 잠수함과 항공기 지원없이는 안전한 항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3개월전 1944년 11월 21일 전함 공고가 일본 본토로 귀환중에 잠수함 뇌격으로 격침,  12월 13일에도 일본 본토로 귀환중이던 중순양함 묘코가 뇌격을 받아 대파, 피항한 일이 있다.

 작전명은 동시기의 일반수송선에 의한 강행수송작전 '남호작전'에 대응하여 명명되었다.


 참가함대는 제4항공전대의 전함'휴우가' '이세'와 경순양함 오요도, 구축함 아사시모, 하츠시모,카스미로 구성, 기함은 휴우가로 전대사령관 마츠다 치아키 소장이 지휘했다. 마츠다 소장은 이 부대를 '완부대'라고 명명, '임무를 완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부대는 싱가폴에서 항공연료용의 가솔린,생고무,주석 등 희소한 자원을 가득 실었다. 항공전함으로 개장되었지만 항공기를 싣지 못했던 이세와 휴우가에는 격납고와 비행갑판에 물자를 꽉꽉 눌러담았고 구축함, 전함 가리지 않고 갑판에 가솔린 드럼통을 만재했다. 이때문에 경미한 공격에도 위험한 상태였다.
탑재물자는 휴우가/이세가 각각 항공유 드럼 5000개,항공유탱크 100톤, 보통휘발유 드럼 300개, 고무520톤, 주석 820톤, 텅스텐 50톤, 수은 30톤, 인원 500명,
오요도는 인원 159명, 고무 50톤, 주석 120톤, 아연 40톤, 텅스텐 20톤, 수은 20톤, 항공유 드럼 86개, 항공유탱크 70톤

1945년 2월 10일 싱가폴을 출항. 호위전투기와 초계기의 지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군은 출항을 탐지하고 부근의 부대에 요격명령을 내렸다.
2번에 걸친 미군의 공습은 2번 다 부근에 발생한 스콜에 숨어서 회피, 마츠다 소장 이하 각함의 임기응변의 대응이 빛을 발하여 이후의 연합군 공격을 모두 회피했다. 2월 20일 완부대는 부대 이름에 걸맞게 완벽하게 구레에 도착, 수송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결과
연합함대 사령부와 해군상층부는 '절반 돌아오면 성공'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지만 부대가 전혀 손상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한것을 알자, 광희난무했다고 한다.
본작전은 미군측도 의표를 찔린 결과였고 전후, 마츠다 소장이 미해군 7함대 참모부에 본 작전에 대해 문의한바 '아하하, 그건 정말 완벽히 당한거였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다.
하지만 군함 6척으로 수송했다지만 물자량에 있어선 중형 화물선 1척분에 지나지 않았다. 전용수송선이 아닌바에야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이정도 양의 물자 수송에 성공했다고 미친듯이 기뻐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일본의 궁상을 말해준다.


항공전함으로 개장되었던 이세.




*마츠다 치아키 소장

포술과 출신으로 주미해군무관보좌관, 군령부 제 1과원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야마토급의 건조를 발상하여 기본구상에 관여했다. 표적함 '셋츠' 함장시절에는 항공공격에 대한 조함 메뉴얼을 작성했다. 전함 휴우가, 야마토 함장과 제4항공전대 사령관에 재직하던 때에도 이 경험을 살려 활약했다. 특히 제해권을 완전히 잃었던 말기에 북호작전을 대성공시킨것으로 유명하다. 휴우가,이세의 항공개장을 제안한것도 마츠다였다. 그 외에도 이세,휴우가의 대공방어는 매우 치밀했다고 한다.
현재의 '면접' 스타일을 일본에 처음도입한것으로 알려져있다.(면접이란 단어도 이때 만들었음.)

패전후에는 마츠다칼텍스를 경영, 1995년 99세로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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