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

옥쇄의 각오

gmmk11 2011. 1. 30. 00:09








이 교수는 "나를 포함한 한국 의료진은 옥쇄하는 심정으로 이곳에 왔다"며 "석 선장의 상태가 결코 쉽지 않지만 반드시 구해내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말했다.



옥쇄란 말을 쉬이 쓸 수 있는 나라도 몇 없을듯.;;

결의를 나타내려고 인터뷰에 옥쇄를 말하고 메이저신문이 옥쇄를 헤드라인으로 뽑고 독자가 옥쇄를 읽고 비장함을 인식하니...
과연 대한민국은 명치일본의 적통이라 할만하다.



옥쇄한다는 말을 들으면 

''앗츠 섬의 정신을 계승하도록'

이렇게 말해줘야 맞는건가;




우리가 흔히 비장감을 돋울 때 쓰는 옥쇄의 시작이 일본위키에 잘 설명되어 있어서 번역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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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중의 대본영 발표에서 가끔 쓰인 표현으로, 부대가 전쟁터에서 전멸하여 소멸해버린 상태를 이른다. 후퇴가 곤란한 상황에 몰린 섬 지역전투에서 발생했다. 옥쇄는 어디까지나 상태의 추인이고 정식 옥쇄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후퇴곤란이라 판단한 군령부가 현장의 병사를 일부 구출조차 않고 포기하고 병사의 항복조차 허가하지 않았기때문에 남겨진 부대는 전멸했다. 하지만 패배, 전멸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대본영지도부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원사망의 사실을 보도할 때 미화하기 위해 사용된 군사선전용어라고 생각된다.


출전은 북제서 원경안전『北斉書』元景安伝의 [대장부녕가옥쇄가능와전大丈夫寧可玉砕何能瓦全 - 훌륭한 남자는 깔끔하게 죽어야하고 기왓장으로써 살아남기보다 깨져도 옥인 편이 좋다. ]. 이 태도표명을 나타내는 용례로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의 시가 있다.

幾歴辛酸志始堅 몇번의 고난을 거쳐 뜻을 굳히기 시작하고

丈夫玉砕恥甎全 사내는 옥처럼 부서질 지언정 기왓장을 부끄러워한다.


또 1886년에 발표된 군가 적은 수만「敵は幾萬」에도

패배하여 도망치는 것은 나라의 수치

나아가며 죽는 것은 나라의 자랑

기와가 되어 남는것보다 옥이 되며 부서지자

다다미 위에서 죽는 것은 무사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라고 불리운다.


동의어로 산화散華가 있다. 주로 특공에서 전사하는 것을 말한다. (역자 주 : 특공이 사쿠라가 지는 것에 비유되기 때문에 그런듯.)
또, 옥쇄가 와전보다 좋다는 가치판단은 보편적인 것이 아닌데, 이 가치관이 많은 국민과 당시 일본지배하의 인민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잘못이라고 전후의 사람들이 평가한다. 오키나와에 전해지는 「命どぅ宝」목숨이야말로 보물, 목숨있고서 물건, 죽은다음에 꽃이 필쏘냐,등의 단어는 옥쇄보다 와전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옥쇄라고는 해도 전원이 사망한 예는 적어서, 실제로는 거의 전원의 사망이다. 부대건제의 항복은 희소했지만 반자이 돌격 전사가 불가능하여 항복한 병사와 중상포로가 존재했다. 역으로 투항을 시도한 병사가 미군에 사망한 례도 몇번 지적된다.(역자 주 : 전후 발간된 병사 수기에 근거, 미국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에피소드로 등장)

옥쇄의 시작

옥쇄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최초로 보도발표에 사용된 것은 1943년 5/29 알류산열도의 애투 attu섬(일본발음 앗츠)의 일본군수비대 약 2600명이 전멸한 시점이다. 전멸이란 단어가 국민에게 주는 동요를 조금이라도 경감하고자 '옥처럼 깨끗하게 부서졌다''라는 인상을 주려고 대본영이 만들어낸 이른바 더블스피크이다. 이때도 실제로는 전원사망이 아니라 수비대 2650명 중 29명이 포로가 되었다.

대본영발표
앗츠섬 수비부대는 5월 12일 이래 지극히 곤란한 상황하에서 적은 수의 병사로 우세한 적병에 대해 혈전을 계속하던 중, 5월 29일 밤, 적 주력부대에 대한 최후의 철퇴를 내려 황군의 진수를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전력을 다해 장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통신은 전부 두절, 전원 옥쇄한 것으로 인정한다. 부상자여서 공격에 참가하지 못한 자는, 일에 앞서 모두 자결했다.

단 전술한 것처럼 애투섬 전투 이전부터 옥쇄라는 단어는 존재했기 때문에 군내부의 문장에서는 용례가 보인다. 예를 들면 1942년 2월 제1차 바탄반도 싸움에서는 키무라부대가 사단사령부에 '제1대대는 옥쇄하기로 한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또 공간전사에서 1942년 12월 8일에 뉴기니아 전선의 고나 지역 바사부아 수비대의 옥쇄를 기록,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세에 의해 1943년 1월 2일에는 같은 뉴기니아 전선의 부나 지역 육해군수비대가 옥쇄를 했지만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1944년 2월이 되었기 때문에 애투 섬 수비대의 옥쇄보도가 먼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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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가만보면 원 출처가 중국고사이고 단어를 그대로 따온 것이라 무리없이 사용가능하지만

단어를 따와서 퍼트린 것이 전쟁에서 한창 박살나던 시절의 일본이라 좀 켕기긴 하다.
'옥쇄각오' 같은 사용례는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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